알폰스 무하는 누구인가
알폰스 무하는 지금의 체코 공화국인 모라비아의 이반시 마을에서 1860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인 아말리에는 첫 자녀인 알폰스 무하를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아들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지만, 넉넉하지 않은 형편 탓에 아들에게 장난감 대신 연필이 달린 목걸이를 선물했습니다. 그 연필로 인해 알폰스 무하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림뿐만 아니라 노래에도 재능이 있던 알폰스 무하는 성가대로 발탁되어 브르노의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 때문에, 빈으로 상경해 연극 디자인 회사에서 근무하며 무대의 배경 등을 그리는 일을 하면서 실무를 통해 예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2년 후 회사 건물이 불에 타는 사고를 겪게 되어 실직하게 된 그는 다시 고향인 모라비아로 돌아와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미쿨로프의 카를 쿠헨 백작이 알폰스 무하에게 성 벽화 장식을 의뢰하고, 작업 결과물을 보고 크게 감동한 백작은 이후 알폰스 무하의 학업을 지원해 줄 정도로 큰 후원을 하게 됩니다. 그의 후원으로 프랑스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순수 미술을 수학할 기회를 얻었지만 2년 남짓 학습한 뒤 줄리앙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콜라로시에 아카데미로 옮기며 본격적으로 잡지와 광고 삽화 작업을 시작합니다.
1894년 크리스마스 쯤, 알폰스 무하는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여배우인 사라 베르나르가 감독하고 출연한 연극 '지스몬다'의 광고 포스터 작업을 맡게 되며 그의 일생일대의 뮤즈와의 첫 작업을 합니다. 알폰스 무하는 의뢰받은 후 2주 동안 석판화로 영화 포스터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알폰스 무하가 작업한 포스터는 당시에 포스터라고 하면 생각하던 사이즈가 아니라 베르나르를 실물 사이즈로 그린 대형 포스터였고, 1월 1일부터 그의 새로운 포스터가 파리 거리를 장식했습니다. 그 포스터가 공개되자마자 파리에 큰 화제가 되었고, 이 작업을 계기로 알폰스 무하와 알폰스 무하 스타일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성공적인 첫 포스터 작업으로 사라 베르나르와 알폰스 무하는 6년 계약을 맺게 됩니다. 또한 사라 베르나르는 알폰스 무하에게 연극의 포스터 디자인뿐만 아니라 의상, 무대 디자인까지 맡기며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라 베리나르 덕분에 알폰스 무하는 하루아침에 무명 예술가에서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예술가로 입지가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알폰스 무하는 예술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아주 평탄하고 순조로운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앞서 소개한 <지스몽다>(1894-1895)가 있습니다. 지스몽다라는 연극의 포스터로, 연극의 제작자이자 주인공인 사라 베르나르에게 화관을 씌우고, 손에는 야자수 잎을 쥐여주며 우아한 그리스 여신의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당시에 이 작품이 파리 시내에서 큰 화제가 되면서 거리에서 포스터를 몰래 떼어가는 일도 잦았다고 합니다.
아르누보의 선구자, 알폰스 무하
알폰스 무하는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예술가입니다. 아르누보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미술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일어난 미술 경향 중 하나로 1980년에서 1910년 사이에 유럽과 미국 등 많은 지역에서 유행한 양식입니다.
새로운 미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르누보가 탄생한 이유는 유럽의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미술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아르누보를 추종하는 예술가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어 했고, 그 결과로 아르누보의 많은 작품이 과거의 요소가 아닌 자연의 요소에서 영감을 얻게 됩니다. 담쟁이나 나뭇잎, 꽃 등에서 모티브를 얻어 유선형의 유기적인 형태를 즐겨 사용합니다.
또한 아르누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심미적'이라는 것입니다. 아르누보는 화려한 스타일과 장식적 요소를 극대화하여 형식적인 미학을 강조합니다.
아르누보 양식은 단기간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유행했지만, 그 유행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기술이 발달하며 아르누보의 인기가 모더니즘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모더니즘은 간결하고 직선적인 형태를 즐겨 사용하고 효율을 중시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극한의 장식을 추구하는 아르누보와는 대척점에 있는 사조였습니다. 모더니즘의 유행이 아르누보의 쇠퇴를 불러온 것이죠. 또한, 아르누보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특징이 유행하면서 사치스러움을 부추긴다는 비평도 생겨나며, 아르누보가 부르주아의 허영심을 키우고 노동자들의 힘든 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여러 이유로 아르누보는 빠르게 인기를 끈 만큼 사람들의 관심에서 빠르게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라 베르나르, 영원한 뮤즈
사라 베르나르는 1844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연극배우로 뛰어난 예술성과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배우로서 엄청난 인기를 끌며 여신 사라라고 불릴 만큼 엄청난 슈퍼스타였습니다. 그는 고위층을 상대로 매춘하는 어머니, 줄리 베르나르의 딸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딸을 수녀로 키우기 위해 7살이 되던 해에 후원받아 파리 근교의 기숙학교에 보냅니다. 하지만 이내 딸의 재능을 알아본 그의 어머니는 후원자를 설득해 파리 음악학교로 옮겨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1862년에는 프랑스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의 학생으로 입학합니다. 이곳에서 연기를 배웠지만, 그는 다음의 사건으로 인해 1863년에 극장에서 쫒겨나게 됩니다. 극장 행사에 그의 여동생을 초대했고 여동생과 주역 여배우 사이에 시비가 붙게 됩니다. 사라 베르나르는 여동생을 대신해 대선배의 뺨을 올려 쳤습니다. 이 사건으로 주역 여배우였던 마담 나탈리는 극장 측에 사라 베르나르의 퇴출을 강하게 요구했고, 극장은 마담 나탈리의 뜻에 따라 그를 내치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으로 극장에서 나오게 되었지만, 그는 생계를 위해 다시 무대로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작은 배역들을 맡으며 근근이 생활하였지만, 1869년에 푸랑수아 포레 르 파상이라는 극에서 정부 역을 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곧 전쟁이 발발하게 되어 공연은 중단되고, 극장은 병원으로 사용되면서 그녀는 무대의 배우 대신, 부상병을 간호하는 간호사로 역할을 바꾸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무대로 복귀한 그녀는 유럽을 넘어 미국, 캐나다, 남미까지 투어 공연을 다니면서 이제는 전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어느 나라를 가든 귀빈 대접을 받게 되었고, 큰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배우로서 성장한 사라 베르나르이지만 말년의 그에게 큰 시련이 닥칩니다. 투어 도중 무대에서 낙상사고를 당하며, 한쪽 무릎을 심하게 다치게 된 것입니다. 6개월동안이나 다친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수술이 시급한 상태였지만, 그에게는 수술보다 당장 무대에 오르는 것이 더 급했고 그녀의 다리는 점점 악화되어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대에 계속 섰으며, 앉거나 다리를 지탱할 수 있는 곳에 서서 연기를 계속했습니다.
이 사고를 시작으로 그녀의 몸은 계속 약해져 갔지만 그의 연기에 대한 열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종 무대 위에서 의식을 잃곤 했습니다. 결국 사라 베르나르는 1923년에 무대에서 쓰러진 이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